엔저 이유 를 알고 투자하자
경기회복 조짐이 나타나자 일본 열도가 들떴다. 1991년 버블 붕괴 이후 30여년 못 보던 풍경이기 때문. 올 1분기 성장률이 0.7%(전분기 대비), 연 환산하면 2.7%에 달했다. 제로 성장에 익숙한 터라 흥분할만하다. 아베노믹스가 드디어 결실을 보고 있다는 낙관론이 나온다. 일본 경제는 내수 중심이다. 국내총생산(GDP) 중 가계소비가 54%를 차지한다. 돈을 풀어도 꿈쩍 않던 소비가 1분기 0.5% 증가했다. 설비투자도 1.4% 늘었다. 엔저와 코로나 엔데믹 덕분에 관광도 호황이다. 3월 외국 관광객은 182만 명으로 집계됐다. 1년 전의 100배다.
소비가 늘면서 기업에 온기가 퍼진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올해 상장사 순이익이 2% 넘게 증가할 전망이다. 제자리를 맴돌던 임금도 오른다. 올해 임금 상승률은 93년(3.9%) 이후 최고치가 예상된다. 닛케이지수는 3만3000을 넘어섰다. 33년 만에 최고치. 미국·중국 갈등 속에 일본이 대만의 대안 투자처로 떠오른다. 워런 버핏의 버크셔해서웨이가 대만 반도체업체 TSMC 주식을 매각했다. 그 돈으로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 5대 종합상사 주식에 60억 달러(약 8조원)를 투자한 게 화제가 됐다.
90년대 이후 줄곧 1% 안팎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올랐다. 젊은이들은 한 번도 경험 못한 인플레이션이다. 디플레이션을 깰 불쏘시개를 바라던 일본이다. 하지만 물가가 과도하게 오르면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나쁜 인플레이션’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은 고물가 대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문제는 물가가 올라도 금리를 올려 돈줄을 조일 수 없다는 점이다. 그동안 경기 부양을 위해 재정지출을 늘렸다. 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256%로 선진국 중 가장 높다. 그 돈을 메우기 위해 국채를 발행했고, 일본은행이 국채의 50%(530조엔)를 떠안았다. 아베노믹스를 시작한 10년 전보다 다섯 배나 늘었다. 금리를 올리면 국채가격이 하락해 대규모 평가손이 불가피하다. 이자도 많이 늘어난다. 금리를 쉽게 올리기 어려운 이유다.
엔저도 뜨거운 감자다. 미국과의 금리 격차로 엔화는 달러당 140엔을 웃돌고 있다. 통화가치는 한 나라의 펀더멘털을 반영한다. 통화 약세는 그만큼 국력이 약화됐다는 의미다. 기업은 부자여도 국민은 가난해진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에서 일본은 대만에 밀렸다. 근로자 평균 임금은 G7 중 최하위다. GDP는 2010년 중국에 세계 2위를 내주더니 독일의 추격으로 3위도 위태롭다. 88년 세계 시가총액 100대 기업 중 53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지난해는 도요타 한 곳만 포함됐다.
엔저에도 1분기 수출은 4.2% 감소했다. 글로벌 교역량이 줄어든 영향이 크지만, 기업 경쟁력도 시원치 않다. 고부가가치 제품 수출이 부진하다. 독일이 고부가가치 공산품을 생산하며 수출을 꾸준히 늘린 것과 대비된다. 도요타 등 대표 기업이 생산 거점을 해외로 옮긴 것도 원인이다. 제조업 해외생산 비중이 98년 10%에서 2020년 24%로 늘었다. 해외에서 생산해 해외에 파니 엔저로 인한 가격 효과를 못 보는 것이다.
더 치명적인 건 세계 IT 혁명에 올라타지 못한 점이다. 지금도 사무실에서 팩스와 도장을 쓰고, 관공서·은행에서 플로피디스크로 자료를 저장한다. 신용카드를 안 받는 점포가 흔하다. 정부가 최근 마이넘버카드(한국 주민등록증) 보급에 공을 들이지만, 입력 오류와 발급 지연이 속출한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일본 디지털 기술력은 63개국 중 62위다. 빅데이터 활용과 기업 민첩성은 꼴찌다. 세계는 정신없이 바뀌는데, 벌어들인 돈을 쌓아두는 ‘축소 균형’에 주력한 결과다. 기업 지배구조에도 약점에 있다. 오너 아닌 이사회 중심 의사결정 구조로는 신속 과감한 투자를 하기 어렵다.
20일 한국예탁결제원 세이브로에 따르면 전날 기준 한 달 동안 국내 투자자들은 일본 주식 6731만달러(약 862억원)를 사들였다. 같은 기간 중국, 미국, 홍콩 등에서는 자금이 빠져나갔으나 일본에만 유일하게 자금이 유입됐다.
일본에 돈이 몰리는 것은 최근 일본 증시가 가파르게 상승해서다. 전날 일본 도쿄 주식시장에서 닛케이255지수는 33388.91을 기록했다. 이는 한 달 전 대비 8.38% 뛴 수치다. 닛케이255지수는 지난 13일 1990년 7월 이후 33년 만에 심리적 고비인 3만3000선을 회복한 후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엔저로 인해 상장 기업들이 올 1분기 실적 개선세를 보이고, 경제성장률 역시 높아졌기 때문이다. 또 일본은행의 금융완화 정책 지속,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의 일본 주식 매수 등으로 인해 일본 증시는 30년 만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일학개미들은 주로 반도체, 기술주 등을 사들이고 있다. 최근 한 달간 일학개미들이 가장 많이 사들인 일본 종목은 'GLOBAL X 일본 반도체' ETF로, 순매수 금액은 2666만달러(약 342억원)이다.
이웅찬 하이투자증권 연구원은 "TSMC도 미국 애리조나에 증설하는 것은 망설였지만 일본 구마모토에는 자처해서 10조원 규모의 신규 팹 투자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며 "일본은 반도체 소재, 기계와 로봇, 상사 등 산업재 전반에서는 최고 수준의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엔화 약세와 한국과 일본의 관계 개선에 따른 수혜 기대 등으로 최근 일본 반도체 대표 주들의 주가도 강세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일학개미들은 '아이셰어즈 미국채 20년물 엔화 헷지' ETF를 2499만달러(약 320억원) 어치를 사들였다. 엔저로 인한 환차익을 노려 투자한 것으로 보인다.
원/엔 환율은 전날 100엔당 897.49원을 기록, 8년 만에 800원대로 무너졌다. 비록, 이날 원/엔 환율은 전일 대비 4.82원 오른 902.31원을 기록했으나 엔저 흐름은 계속되고 있다.
이외에 일학개미들은 소니그룹 507만달러(약 65억원), 미쓰비시상사 307만달러(약 39억원), 아식스 304만달러(약 39억원), 신에쓰화학공업 279만달러(약 36억원), 마루베니 220만달러(약 28억원) 등을 샀다. 해당 종목들의 경우 대부분 시장 기대치를 웃도는 실적을 올려 주가가 상승했다.
국내 시장에 투자하는 개인투자자들도 엔화 관련 ETF를 사들이는 등 엔저를 투자 기회로 삼고 있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개인투자자들은 전일 기준 한 달 동안 'TIGER 일본엔선물 ETF'를 365억원어치 샀다. 같은 기간 'TIGER 일본니케이225' ETF도 53억원 사들었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엔저 현상이 이어질 것으로 봤다.
배정연 신영증권 연구원은 "일본은행 신임 총재인 우에다가 기존의 금융 완화 기조를 유지하고 있어 당분간 엔화 약세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며 "트레이딩 관점에서는 환헤지된 ETF를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환노출된 ETF로 접근하며 환차익을 고려해보는 것을 권고한다"고 했다.
그는 "다만, 엔화의 추세적인 약세는 지속 가능성은 작다고 판단한다"며 "중장기적 관점에서 일본엔 선물 ETF에 접근해 보는 것도 매력적인 선택지일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증시 상승세는 다소 둔화할 수 있으나 일본 주식 투자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전망도 나왔다.
최보원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닛케이 255 지수가 33000선을 돌파하면서 추가 상승 속도는 둔화할 것으로 예상한다"면서도 "환율, 상장 지역에 따라 다양한 투자 전략을 구축할 수 있는 국가인 만큼 하반기 일본 투자는 지수의 상승 여력보다 업종 기반의 대응이 유효하다"고 분석했다.
이어 "달러 강세 압력 약화 시 반등이 컸던 일본 대형 수출주와 반도체 관련주는 일시적으로 주가가 되돌려질 수 있으나, 업황 개선에 따른 상승도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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